3월 21일(토) 말씀 묵상 - 요 11:31-37

♥3월 21일(토) 말씀 묵상

*말씀: 요한복음 11:31-37
33-35절,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찬송: 웬 말인가 날 위하여(새143/통141장)

(어제 본문의 중간에 있는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하늘에 올라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판이란, 그 사람이 세상에 살 동안 이룬 ‘선’과 ‘악’을 천칭저울에 달아서 재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가 행한 악을 저울 한편에 쌓았는데, 마치 산더미처럼 많아서 저울이 부서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의 창고에서 겨우 찾아낸 것이라곤 아주 소량의 액체 뿐이었습니다. 염분이 약간 섞인 물, 바로 눈물 두 방울이었습니다.
이건 재보나 마나지요. 하지만 그래도 법에 따라 그 눈물 두 방울을 천칭 반대편에 올려봅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올려놓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천칭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평행을 이루고, 드디어 선 쪽으로 기우는 것입니다.

눈물이란 무엇일까요? 눈을 보호하기 위해 나오는 짭조름한 물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눈물은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역사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눈물은 그 사람의 마음이고, 연민이고, 또 사랑입니다. 때로는 미움과 분노이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눈물은 공감이요 소통입니다. 눈물은 한없이 차갑기도 하고, 불처럼 뜨겁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세태를 한탄하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세상은 불행합니다. 소통과 공감이 없는 삶은 얼마나 깜깜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합니까?

요한복음이 맞닥뜨린 헬레니즘 세계의 이상적 인물상은 바로 괜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이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순수한 영적인 존재는 한갓 물질에 불과한 눈물 따위와는 멀어야 했습니다. 고도로 훈련 받은 사람이, 더구나 남자가 눈물이나 찔찔 짜서야 뭣에 쓰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이 주목하는 예수님은 결코 이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연민이 있으십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우시는 분입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분입니다.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또 그녀와 함께 우는 유대인들을 보시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며 우셨지요. 비통하여 괴로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게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우는 분이셨습니다.

요즘 이 시대는 끔찍한 범죄 앞에서도 무감각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이의 아픔에도 무심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사이코패스’ 범죄가 큰 문제입니다. 아픔에 무감각하고 공감 능력이 없는 이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범죄의 뉴스들을 우리는 봅니다.

신앙인이 가장 경계해야 하고,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한 마음을 본받아 함께 아파하는 것, 더욱더 심해가는 전염병의 두려움 속에, 우리의 마음이 다른 이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외면하는 영적 무감각과 무심함을 경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함께 눈물 흘리고 가슴으로 아파하며 이 어려움들을 함께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하며 중보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 베다니 공동체의 공감과 긍휼의 눈물을 통하여, 나사로를 일으키시고 살리신 주님의 생명과 부활의 표적이 이 혼란의 시대, 이 시카고 땅에 이루어 지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눈물을 흘리신 주님!
웃는 이들과 함께 웃으시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의 아픔, 이 시대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 우리도 다른 이들의 아픔, 이 땅의 아픔을 알게 하소서. 함께 울게 하시고, 치유되고 회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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